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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고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대탐험 줄거리 배경 요약

by 책보는좀비 2024. 5. 15.

가톨릭 군주에게 신세계를 바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아버지는 제노바(이탈리아 항구도시)에서 술집을 운영하셨다. 콜럼버스는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선원들의 모험 이야기를 들으며 바다 너머를 꿈꾼다. 열다섯 살이 된 콜럼버스는 선원들의 심부름꾼으로 배에 오른다. 배는 카오스 섬, 잉글랜드, 아일랜드 등을 항해했다.
 
어느 날, 배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난파되었다. 다행히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해안으로 떠밀려 왔고 리스본 항구에 머물면서 항해 공부를 하였다. 대서양으로 가는 무역선을 타고 아이슬란드와 기니를 항해하는 동안 바람과 해류에 대해 연구한다. 나침반과 십자형 선들을 그려진 포르톨라노 해도로 바닷길을 찾는 법을 배웠다.

십자군 전쟁 후 유럽은 인도의 향신료와 후추에 관심을 가지며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는데 열을 올렸다. 육지 이동로는 오스만제국이 막고 있어서 바닷길을 찾는데 열중했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며 인도로 가는 계획을 세운다. 지구는 둥그니깐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인도에 도착할 거라고 예상하였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를 찾아가 후원을 요청하지만 왕은 다른 사람(바르톨로 뮤 디아스)을 후원하고 있다며 거절한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떠났다.
 
당시 에스파냐는 1469년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이 결혼하여 여러 나라를 규합하여 만든 나라였다. 콜럼버스는 라비다 수도원에 머물며 안토니오 데 마르체나 주사로부터 권위 있는 몇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중 수도원 원장인 페레스는 이사벨 여왕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이었다.
 
콜럼버스는 그동안 조사해 온 내용들을 왕과 여왕에게 설명하며 향신료와 비단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여왕은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산타마리호를 타고 첫번째 출항 

콜럼버스는 후안 데 코사라 선장과 함께 산타마리아호를 탄다. 왕과 왕비가 사준 니냐호와 핀타호와 함께 1492년 8월 3일 출항한다. 카나리아 제도(아프리카 북서부)에서 보급품을 싣고 신대륙을 향해 서쪽으로 출발하였다. 1492년 10월 12일 섬에 도착한다. 산살바도르(중앙아메리카 엘살바도르의 수도)라 명명하고 에스파냐 국기를 꽂는다.
 
섬의 원주민 타이노 족은 선량한 민족이었다.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라고 믿고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이곳은 아메리카, 쿠바 동쪽의 섬 바하마 제도였다. 금을 찾아 남쪽 쿠바를 거쳐 1492년 12월 아이티 섬에 도착한다. 이곳이 훗날 히스파니올라라고 불리게 된 아이티 공화국과 도미니카 공화국이다.
 
히스파니올라 섬 원주민들은 매우 친절하여 금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콜럼버스는 그곳에 요새를 세우고 크리스마스에 시작되었다는 뜻의 나비다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1493년 1월 콜럼버스는 이곳에 마흔 명의 선원을 남기고 목화로 만든 천 면화, 고추, 앵무새 등등 왕에게 바칠 물건들을 챙기고 원주민도 데리고 에스파냐로 돌아간다.
 
1493년 3월 15일 에스파냐 왕과 여왕은 감동받는다. 함께 온 타이노 족은 세례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왕과 여왕은 섬의 원주민에게 가톨릭을 알리라며 또 한 번 후원한다.

두 번째 출항 - 콜럼버스는 변했다. 

콜럼버스는 대양의 제독이라는 지휘를 얻고 1493년 9월 두 번째 항해를 떠난다. 니냐호를 포함한 17척의 배에 1500명의 선원과 가축과 충분한 보급품을 싣고 떠난다.
 
도미니카에 에스파냐의 깃발을 꽂고, 마리에 갈란테 섬에 도착한다. 그곳은 식인종 카리브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타이노 족을 가축처럼 기르고 있었다. 단번에 그들을 제압하고 북서쪽에 있는 섬들 몬세라트, 안티과, 나비스, 세인트킷츠라는 이름을 붙여 에스퍄냐 깃발을 꽂았다. 오늘날의 자메이카, 도미니카, 과들루프, 푸에르토리코 등이다. 오랜 항해 끝에 첫 요새인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했다.
 
정착을 목적으로 오두막집을 짓고 총독 관사, 창고, 교회당을 세웠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빨리 마을을 완성시키고 싶은 마음에 원주민들에게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모기와 전염병에 걸려 원주민과 이주민들이 죽어갔다. 콜럼버스는 점점 우울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농장에서 부릴 원주민이 죽어가자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데려왔다. 그런데 노예들조차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이주민들은 악랄해졌다.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세번째 출항

이 소식을 들은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에스파냐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탐험가 기질을 높이 평가해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콜럼버스는 1498년 5월 세 번째 항해를 한다.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 해안에서 많은 진주를 발견하고 첫 요새로 돌아간다.
 
하지만 동생 디에고에게 맡겼던 히스파니올라는 참혹하게 변해있었다. 실망한 왕과 여왕은 그곳에 새로운 총독 보바디야을 보내고 콜럼버스와 두 동생은 에스파냐로 끌고 와 재판을 받게 하였다.

중앙아메리카에 도착한 네번째 출항 

하지만 콜럼버스의 열정에 못 이겨 이번엔 배만 지원해 준다. 그리하여 1502년 5월 네 척의 배에 150명의 선원을 태우고 네 번째 항해를 떠난다.
 
중앙아메리카 대륙 구아나하 섬에 도착한다. 금을 발견하고 요새를 세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전과 다름없이 원주민을 무시하고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콜럼버스는 그곳에서 쫓겨나 항해 도중 음식과 보급품이 떨어지고 배가 부식되자 자메이카 해안에 머물렀다.
 
1년 후 에스파냐에서 구조선이 왔다. 콜럼버스가 에스파냐로 돌아왔을 때는 환영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사벨 여왕도 세상을 떠났다. 1506년 5월 쉰여섯 살의 나이로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에서 생을 마감했다. 불행히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명예 회복은 죽은 후에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