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재판과 마녀재판
종교재판은 각 나라의 국왕, 영주, 각 지방의 세속적인 재판으로 행해졌으며 형식은 끔찍할 정도로 잔인했다. 종교재판은 종교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섞여 지배층에게 이로운 재판이었다. 17세기에는 악마의 꾐에 넘어가 사회를 파괴한다는 의미로 마녀재판으로 바뀌었다. 마녀재판은 프랑스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후 유럽에서 유행처럼 마녀사냥이 퍼져나갔다. 1820년경 폐지되었다.
갈릴레이 재판
1633년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우주론을 진리로 인정함으로써 종교재판을 받았다. 그는 로마의 토스카나 공작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을 당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갈릴레이는 '지구는 돈다'라는 학설을 말한 적 없다고 고백함으로써 이단이 아닌 불복종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재판이 끝난 뒤, [두 개의 과학에 대한 대화]를 집필해 기계물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메르카토르재판
16세기 천재 지도학자 메르카토르는 1538년 지구표면을 둘로 나뉘어 심장모양의 전개도 지도를 제작하였다. 그는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였다가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조사기간 7개월 동안 지하감옥에서 공포에 떨었으며 다시는 개혁을 꿈꾸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에 풀려났다. 그 후 [아틀라스:지도] 제작에 몰두하며 가톨릭 교회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타리나와 케플러 모자 재판
과학자이자 신학자인 케플러는 홀어머니 밑에서 3명의 자녀와 함께 약초로 만든 의약품이나 연고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어머니를 시기하던 친구에 의해 마녀로 고발 당해 1615년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의 법학자들에게 자문을 얻어 어머니 변호를 하여 풀려나게 만든다. 이후에도 카타리나는 두 어린이와 가축을 죽인 혐의를 받아 손발이 묶인 채 14개월을 감옥에서 고통을 받았다. 이 때도 아들의 변호로 풀려나지만 힘든 감옥생활과 마녀라는 오명으로 인해 석방 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잔다르크 재판
1429년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전쟁터로 나간 17살의 소녀 잔다르크는 오를레앙 땅을 탈환하고, 샤를 7세의 대관식까지 무사히 실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1430년 콩피에뉴 전투 중 말에서 떨어진 그녀는 영국군에 잡혀 1431년 마녀 혐의로 종교 재판을 받게 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구국의 소녀이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원수였기 때문에 종교재판이 유행하면서 영국 편이었던 루앙지역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샤를 7세가 25년 지난 후 재심을 열어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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