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안에서 땅따먹기 영토분쟁
중세유럽의 봉건제도는 왕이 영주들에게 충성의 대가로 영지(통치를 허락한 땅)를 주었다. 왕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만 각 지방의 영주들 역시 자신의 땅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시대였다.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가스코뉴 지역을 영국 왕이 소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토를 받은 것이다. 영국은 섬이기 때문에 내륙이 탐나기도 했고, 당시 봉건제도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는 현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를레앙과 일드 프랑스는 왕령지(왕의지배)였고 부르고뉴와 폴랑드르, 브르타뉴는 공작령(공작지배)이었다. 폴랑드르는 모직물생산을 위해 가스코뉴와 친하게 지냈다. 원료인 양모가 영국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 이때는 국가적 경계선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 편에 있다가 프랑스 편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서서히 세력을 키운 공작령이 있었으니 부르고뉴였다.
중세 후기 프랑스 정치적 변화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권과 봉건세력(영주, 기사)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된다. 왕권이 강한 나라는 더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전쟁을 거쳐 넓은 땅을 소유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가 자주 전쟁을 벌인것이다. 백년전쟁 전부터 전쟁은 많았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들고 재정을 어렵게 만든다. 재정난 극복을 위해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성직자 세금 부과 추진하였다. 반발이 심했겠지?
필리프 4세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종교에 반항했다가 백성들의 미움을 받고 왕권이 약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프랑스 최초로 성직자, 귀족, 도시대표들이 모아 노트르담 성당에서 개최하는 신분제 의회 삼부회를 소집한다. 왕은 귀족과 도시대표들에게 묻는다. 내편할래? 교황 편할래? 백성들은 상승추세인 왕 편들어야지.
힘을 얻은 왕은 아나니에 있던 교황을 습격해 3일 감금하고 절대 굴복시키며 퇴위를 강요한다. 그리고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그곳에 교황이 갇아 놓는다. 교황은 프랑스 왕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왕 완승!
전 교황이 죽고 새로운 교황을 뽑기 전 추기경들이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교회에서는 프랑스 출신은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교회 대분열이 생긴다. 그래서 독일 콘스탄츠에서 종교회의를 열게 된다. 결국 로마교황 선출.
중앙 집권 국가 출현.
교황과 기사,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 강화되면서 중앙 집권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원래 왕은 기사들이 지켜줘야 하는데 각 지방 영주들의 힘을 약화시켜 놨으니 영주를 지키던 기사들의 힘도 약해지겠지. 그럼 누가 왕을 지켜?
그래서 관료(공무원)와 상비군(항상 준비되어 있는 군대)을 마련하여 보호를 받는다. 이 제도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상공시민들에게 지원받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해 준다. 즉,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영국(13세기) 존왕은 역대 선왕들이 정복했던 많은 땅을 잃은 무능한 왕이었다. 나가는 전쟁마다 패한다. 전쟁은 돈이라고 했지? 재정이 고갈나버렸네? 국가 재정을 위해 귀족들에게 무거운 세금 부과한다. 화가 난 귀족들은 왕권을 제한하는 문서 대헌장을 준비한다. 무늬만 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헌장을 승인하게 된다. 이로써 왕권 약화! 귀족 강화! 하지만 존왕의 아들 헨리 3세가 대헌장을 무시한다. 귀족 반란한다. 제법 영리한 시동드 몽포르가 반란의 지도자 탄생. 에드워드1세(헨리 3세의 아들)가 모범 의회 소집함으로써 왕권강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백년전쟁의 배경
영국의 존왕과 대립을 이루고 있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영국왕 소유였던 노르망디를 가져오게 된다. 필리프 2세부터 왕권이 강화되면서 4세 때 삼부회가 소집한다. 왕권이 강화된 필리프는 기울어가는 존왕을 누르고 영국왕 소유였던 땅들을 되찾아 온다. 노르망디는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하게 된 시발점이다.
필리프 4세가 아들이 없이 죽게 된다. 에드워드 3세가 필리프 4세의 외손자임을 강조하며 왕을 지원한다. 프랑스 귀족들은 영국왕을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리프 4세의 조카 발루아 백작(필리프 6세)을 왕으로 추대한다. 새로운 왕이 탄생했으니 귀족들은 새로운 충성서약을 작성해야겠지? 문제는 가스코뉴의 영주였던 영국왕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충성서약을 거부한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외교는 격렬해지고 사태가 악화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경제에 타격을 주기 위해 양모수출을 금지한다. 폴랑드르는 큰 손해를 입는다. 그다음 해에는 필리프 6세가 가스코뉴지방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분쟁이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337년부터 1453년의 전쟁을 백년전쟁이라 부른다.
두둥두둥! 백년전쟁 시작! 전반기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죽고 장남 장 2세가 왕이 된다. 전쟁 중 장2세가 인질로 잡혀가게 되고, 장 2세의 아들 샤를이 왕위에 오른다. 샤를 5세는 통치기간 내내 현실적이고 신중한 정책을 펼쳤다.
에드워드 3세는 넷째 아들 존오브콘트에게 전쟁과 관리를 넘긴다. 전쟁마다 실패하긴 했지만 존의 아들이 헨리 4세가 왕위를 이어간 게 된다.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를 무렵 프랑스에서는 샤를 6세가 즉위한다. 프랑스가 연이은 패배당할 때, 영국이 프랑스의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영국의 승리로 끝나갈 때쯤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라는 소녀가 등장하게 된다. 염력을 발휘한 것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는 포스를 뿜어내며 성령의 힘을 얻어 보이는 것 자체로 영국군을 쫄게 만들었다.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연승하고 잃었던 땅들을 되찾게 된다.
백년전쟁 후 장미전쟁
영국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왕의 섭정을 놓고 장미전쟁이 일어난다. 귀족을 상징하는 가문의 문장이 장미를 사용했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부른다. 장미전쟁의 발단은 에드워드 3세가 죽고 아들 리처드 2세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숙부(작은 아빠) 존오브곤트가 섭정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된 리처드 2세는 숙부 가족을 프랑스로 추방하고, 존오브곤트의 영지를 몰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존의 아들 헨리가 군사를 일으켜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킨다. 헨리의 왕위 찬탈 사건이 장미전쟁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요크가문문장(흰 장미)과 랭커스커 가문문장(붉은 장미)의 전쟁! 랭커스터 가문 헨리 튜더와 요크 가문 엘리자베스가 결혼하여 헨리 7세가 즉위(튜더왕조)한다. 영국은 장미전쟁을 끝으로 왕 중심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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