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고전

로마공화정 삼두정치 카이사르 로마 제정 옥타비아누스

by 책보는좀비 2023. 12. 1.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의 이야기

7월(july)은 Julius Caesar(줄리어스 시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저는 지배자, 황제라는 뜻이고, 로마에서 불리는 실제 이름은 율리어스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의 여친은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다.
8월(August)은 Augustus(아우구스투스)는 존엄자라는 뜻에서 비롯되었고, 옥타비아누스를 말한다. 로마 황제이다.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가 카이사르다. 

로마는 어떻게 강해졌을까?

로마는 기원전 8C 부터 있었다. 알렉산더대왕이 죽자, 로마가 힘을 뻗치기 시작한다.
로마는 민주 정치와 비슷한 공화정 정치(BC6C)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내가 지킨다라는 강한 의지가 담긴 주인정치를 말한다. 처음에는 왕족과 귀족이 정치를 했었고, 국력은 약했다.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평민의 대표자인 호민관을 선출되고, 공화정은 집정관(행정, 군사담당), 원로원(자문 의결기관), 호민관이 함께 힘을 합쳐 나라를 운영[삼두정치]하면서 강해지게 된것이다.
 
로마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세1세처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처럼 주변국가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거대한 제국을 완성하였다. 로마는 기원전 3C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한니발장군과 코끼리 부대)을 치르고, 많은 땅을 얻는다. 싸움은 평민(중장보병)들이 했는데 귀족들이 많은 땅을 차지하자 평민들은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을 주장한다. 평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공화정이 무너진다.

네이버에서 캡쳐

로마를 사랑한 율리어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

카이사르는 어릴적부터 귀족과 평민들의 빈부격차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귀족들의 땅을 빌려 쓰는 평민들을 걱정하였다. 비록 귀족들에 의해 사망하였지만,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을 찬성하였다. 귀족과 평민 모두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날, 카이사르의 고모부 마리우스와 고모부 친구 킨나가 총사령관 술라가 전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그들은 처형당하고,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쫓겨난다.
 
시간이 흘러, 술라가 죽자 카이사르는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뛰어난 웅변술의 소유자 몰론을 찾아 로도스 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카이사르는 힘없는 평민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나랏일과 종교법을 관리하는 최고 제사장이 된다.
 
다음 목표는 행정과 군사를 맡아보던 집정관(장관)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평민 편을 드는 카이사르가 최고관리자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방법을 찾던 카이사르는 장군 폼페이우스와 부자 크라수스를 찾아간다. 그들은 평소 원로원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흔쾌히 카이사르의 손을 잡는다.
 
이렇게해서 힘 있는 세 사람 함께 하는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고, 그라쿠스 형제가 실패했던 농지법도 통과시킨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총독이 되어 군대를 이끌게 된다.
 
크라수스가 죽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이용해 카이사르의 군사력을 빼앗으려 한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점령하고 다시 집정관이 된다. 이 때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나가자, 주사위는 던져 졌다!"
 
마침내 로마는 평화를 찾은것만 같았지만,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처리하면서 삼두정치는 막이 내리고, 황제(독재)가 된다. 황제의 독재권에 불만이 많았던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처리하기로 계획한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회의장에 들어선 카이사르는 충신 브루투스와 원로원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 뒤로 로마는 망했냐고? 카이사르가 양자로 삼았던 옥타비아누스(BC1C)가 절대권력자로 집정관이 되면서 황제가 된다.
 
그는 독재를 하지 않았다. 다시 삼두정치 시작. 그래서 그를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른다. 이로써 로마의 공화정 시대가 끝나고 제정시대가 시작된단다. 기원 후 3C 때 군인황제(폭군)가 나타나고 나라가 망하기 시작한다. 폭군밑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백성들은 종교에 의지하게 되고, 크리스트교가 부흥한다.

로마의 쇠퇴

로마의 군인 황제들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밀라노칙령 313년]에서 크리스트교를 믿고 의지해보자며 백성들에게 희망선언한다.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으로 옮긴다. 그리고 불안한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지정한다. 하지만 로마는 여전히 잔인하고 포악했다.
 
그래서 성질이 다른 두 나라로 분열된다.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진다. 동로마는 유스티아누스라는 좋은 왕 때문에 성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으로 유지된다. 서로마는 개판으로 살다가 5C에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된다.